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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12-15 16:34
2. "기술 '오타쿠'가 독주… 갈라파고스 경제에 빠져"
 글쓴이 : 최고관리자 (124.♡.0.82)
조회 : 3,381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

 일본 기업의 강점은 ‘모노즈쿠리(혼이 담긴 고도의 제조 능력)’에 있다. 현장의 기술자가 꾸준히 기술과 노하우를 연마하면서 경쟁사가 따라올 수 없는 독특한 기술력을 축적하는 것이다. 일본 기업이 만든 고(高) 품질의 부품이나 소재, 기계는 첨단 기계에서부터 자동차, 전기전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의 산업을 뒷받침하고 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도 중요 부품을 일본에서 조달할 정도다. 일본은 독자 기술로 4.5톤의 화물을 적재할 수 있는 우주 로켓 H2B의 발사에 성공, 2010년 퇴역할 예정인 미국의 스페이스 셔틀을 대신해 국제우주정거장 건설에서 활약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평판 TV, 하이브리드 자동차, 전기자동차, 태양전지, 각종 반도체, 초심해 원유 개발 장비 등 일본의 부품 및 소재가 없다면 산업의 존립 자체가 어려운 것도 허다하다.

■현장의 우위를 살리지 못하는 전략 부재(不在)
이렇게 막강한 제조업 기반 위에 서있으면서도 일본 경제가 휘청대는 이유는 뭘까? 문제는 효과적인 비즈니스모델을 구축해 기술적 강점의 부가가치를 제고시키는 전략력, 기획력이 구미 선진 기업에 비해 부족하다는 데 있다. 글로벌 경영 환경에서는 강한 기술력이 고수익으로 연결될 수 있게 만드는 전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시장 상황에 따라 때로는 일전을 불사하고, 때로는 손을 잡아야 한다. 하지만 일본 기업은 이런 측면에서 뒤떨어진다.

일본 부품업체 중에는 세계 시장의 절반 이상을 지배하는 기업도 많다. 하지만 미국의 인텔 사(社)처럼 높은 수익률을 내지는 못한다. 완성품 업체도 비슷하다. 소니는 자신의 아성이었던 개인용 음악 장치 시장을 애플에 내줬다. 애플은 하드웨어 제조 분야에서는 뚜렷한 강점이 없고 아웃소싱에 의존한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소프트웨어 개발력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수많은 콘텐츠 기업을 활용하는 개방형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했다.

일본 기업의 경우 CEO가 현장은 잘 파악하고 있지만, 현장의 강점을 활용하는 글로벌 마인드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일본 제조업체는 기술자 출신의 경영진이 대부분이다. 우수한 기술자가 경영진으로 승진해가는 기업 문화를 갖고 있다. 이로 인해 경영을 잘 모르는 ‘기술 오타쿠(한 분야에 깊게 파고드는 마니아)’가 경영진이 되어 방대한 조직을 운영하는 바람에 비효율을 낳고, 현장은 현장대로 2류 기술자만 남게 된다는 비판이 일본 내부에서 나온다.

일본기업 중에는 고객이 요구하는 것 이상의 기술을 완벽하게 실현하겠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고(高) 비용 제품을 만드는 바람에 세계 시장에서 외면당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인구 1억 2700만명에, 1인당 국민 소득이 3만 달러를 넘는 일본 시장에서는 ‘기술 오타쿠’ 전략이 통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술 오타쿠’를 지나치게 쫓는 바람에 세계 시장과 눈높이가 잘 맞지 않게 되고 고립된다. 이런 일본 기업의 모습을, 대륙과 떨어져 독특한 생태계를 형성한 태평양의 ‘갈라파고스’ 섬에 비유하는 자기 비판의 목소리가 일본 재계에 높아지고 있다.

‘갈라파고스 신드롬’은 일본 시장이 계속 성장한다면 크게 문제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일본 시장이 인구 감소로 인해 축소되고 있는 데다, 이런 고급 제품을 소비할 만한 다른 선진국 시장 역시 급격히 둔화되면서 어려움에 직면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미국·유럽 등 선진국 경제가 크게 타격을 입고, 앞으로는 신흥시장의 중산층이 세계 시장을 주도할 것으로 예견되면서 글로벌 기업들이 여기에 초점을 맞춰 경영 전략을 짜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일본 기업이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일본 내에서 높아지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과거의 성공에 집착하다 개혁 모멘텀 상실
오랫동안 일본에서는 ‘경제 1류, 정치 2류’라고 정치인을 비웃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경제계도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자신감을 상실했다. 
고도 성장기 이후의 사회·경제 시스템을 고령화 시대에 맞게 전환하면서 성숙된 고소득 국가로 개혁하는 작업은 정부나 기업의 전략적 대응을 필요로 한다. 정치와 경제계 모두 독창적인 아이디어나 비전을 갖고 혁신을 주도해야 하는 것이다.

2차대전 이후 일본은 미(美) 군정이 국가 전략의 기본 틀을 정했다. 일본 정치가의 역할은 그 틀을 전제로 일상적인 전술 수준의 정책을 조정하는 데 머물렀다. 구 자민당 정권은 그런 정치가들을 양산했다. 그들은 기득권을 보호하면서 고도 성장 경제의 성과를 무리 없이 나누는 데 능숙했다. 하지만 이 같은 정치는 고도 성장이 마감되면서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경제적 파이를 키우려면 일부 기득권을 희생하더라도 과감한 구조조정 및 개혁이 필요하다. 1980년대 이후 개혁의 필요성은 계속 제기돼 왔다. 그러나 일본 정치는 개혁을 외면했다. 1990년대 중반 자민당이 일시적으로 정권을 빼앗기기도 했지만, 곧바로 정권에 복귀했다. 이렇게 개혁이 20년 이상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일본 경제의 체력을 떨어뜨렸다.

물론 2차대전 이후 고도 경제 성장과 세계 최대 순채권국으로의 부상 등 구 자민당 정권의 업적은 크다. 하지만 이 때문에 과거의 성공 모델을 고집하려는 성향이 일본 정치는 물론 국민들, 그리고 경제계에서도 고착되었다. 그 결과 과거의 성공 모델을 고집하면서 새로운 전략을 구상하고 결단 내리지 못하는 구조가 일본 경제계에 만연하게 된 것이다.

■하토야마 개혁이 새 희망을 줄까
현장은 강하지만 전략이 약한 것은 2차대전 당시 일본군(軍)의 문제이기도 했다. 나무를 보되 숲을 보지 못해 미일 전쟁이라는 큰 전략적 실수를 범했을 뿐 아니라, 주요 전투에서도 패전(敗戰)했다. 세계 최강의 생산 시스템을 자랑하던 도요타 자동차가 글로벌 위기로 큰 폭의 적자로 돌아선 것도 ‘강한 현장, 약한 전략’의 오류를 보여준다. 미국 시장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무리한 확장 정책을 쓴 반면, 신흥시장에서는 경쟁 기업에 뒤지는 ‘전략의 실패’인 것이다.

일본은 과거 메이지유신과 2차대전 이후에 혁명에 비길 만한 개혁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두 시기 모두 개혁의 동력은 외부에서 왔다. 즉 외세의 압력이 개혁을 불렀다. 하지만 최근 일본은 그런 외부 모멘텀도 없다.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 과정에서도 일본은 세계 최대의 순대외채권국이기 때문에 외부의 쇼크를 차단할 수 있었다. 결국 한국처럼 외부 경제로부터의 충격을 활용해 개혁의 모멘텀을 높이기도 힘들다. 약(藥)이 오히려 독(毒)이 되는 경우다.

최근 하토야마 민주당 정권이 출범했다. 이 정권이 각 분야의 기득권을 제로베이스로 재검토하면서 과감한 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는 민주당 정권은 물론 일본 경제에도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