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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1-13 10:30
불교 중흥에 앞장선 정대스님-조소은(한글/일어)
 글쓴이 : 최고관리자 (124.♡.0.82)
조회 : 3,424  
불교 중흥․ 대중화에 앞장 -
      前 조계종 총무원장 정대 스님 입적

  동국학원 이사장이며 제30대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정대(正大․속명 서병식)스님이 18일 오전 5시 경기도 안양시 삼막사 월암당에서 입적했다. 세수 67세. 법랍 42세.
  전북 전주 출신으로 1962년 전북 완주군 위봉사로 출가했던 정대 스님은 62년 인천 용화사에서 전강(田岡) 스님으로부터 사미계를, 67년 경남 통도사에서 월하(月下) 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았다.

  스님은 조계종 요직을 두루 거쳤다. 69년 여주 신륵사 주지를 시작으로 73년 조계종 총무원 사회국장에 올랐다. 이후 사회부장·재무부장․총무부장 등을 지내며 조계종 종무 행정의 기틀을 다졌다. 또 75년 중앙종회 의원으로 뽑힌 이후 종회 부의장․종회 의장을 역임했고, 99년 11월부터 지난 2월까지 총무원장으로 활동했다.


  임종게(臨終偈)

 올 때도 죽음의 관문에 들어오지 않았고(來不入死關)/
갈때도 죽음의 관문을 벗어나지 않았도다(去不出死關)/
천지는 꿈꾸는 집이니(天地是夢國)/
우리 모두 꿈 속의 사람임을 깨달으라(但惺夢中人)
  고인은 한국 현대 불교계에서 행정력이 가장 뛰어난 스님으로 알려졌다.
 
조계종 내부의 여러 과제를 뚝심 있게 풀어나간 ‘최고 경영인’이란 평도 받았다. 특히 총무원장에 오른 이후 종단의 숙원 사업이었던 총무원 청사 건립․중앙 승가대 이전 등을 해결했다. 내년 완공될 한국불교문화역사기념관의 초석도 다졌다.

  스님은 한국 불교의 국제화․대중화에도 관심을 가졌다. 77년 한․일 불교문화교류회를 결성했고, 89년 불교방성 재단이사에 오르며 방송국 개국을 주도했다. 또 지난해에는 사재를 털어 은정장학재단을 설립, 소년소녀 가장들의 학업을 지원했다.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과 막역한 관계란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고인은 올 초 총무원장에서 물러나며 불교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창종 이래 정치중 1번’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스님과 40년 가까이 교류해온 관음종 총무원장 홍파(泓坡)스님은 “고인은 현대적 감각이 뛰어났고 리더십이 돋보였다”고 말했다.

  스님은 참선 수행에도 열심이었다. 은사인 전강 스님에게서 받은 ‘판치생모(板齒生毛․이빨에서 털이 난 도리가 무엇인가)’를 화두로 붙잡고 ‘마음만 있으면 중생과 부처가 다름 없음’을 깨달았다. 이후 도봉산 망월사 선원을 비롯해 수덕사․용주사 중앙선원 등에서 수행 정진했다. 불교의 수행과 실무를 고루 겸비한 것이다.

  영결식은 22일 오전 10시 경기도 화성시 용주사에서 동국학원장으로 치러진다.
박정호 기자

 仏教中興․大衆化に先駆ける ー 
 元 曹溪宗 總務院長 正大さま入滅

 東国学院の理事長であり、第30代曹溪宗總務院長であった正大(俗名ソビョンシック)さまが18日午前5時、京畿道安養市三幕寺月庵堂で入滅された。歳寿67歳、法臘42歳。
 全羅北道全州市出身で、1962年全羅北道完州郡威鳳寺に出家された正大さまは、同年仁川市龍華寺で田岡さまから沙彌戒を、1967年、慶尙南道通度寺で月下さまから比丘戒を受けた。

  正大さまは曹溪宗の数々の要職を歴任された。1969年には驪州神勒寺の住職になり、1973年には曹溪宗總務院の社会局長になった。以来、社会部長․財務部長․総務部長などを歴任する間、曹溪宗の宗務の行政の土台を築いた。1975年には中央宗会議員として選ばれてから、宗会の副議長․議長を歴任し、1999年11月から2003年2月まで総務院長として活動された。


臨終偈

 来るときも死の関門に入らず(來不入死關)/去るときも死の関門から離れず(去不出死關)/天地は夢見る国であり(天地是夢國)/我はみな、夢の中の人であることに惺るべし(但惺夢中人)
  故人は韓国の現代の仏教系でもっとも行政力の優れた僧侶として知られている。
 
曹溪宗の内部の数々の課題をねばり強く解決していった「最高の経営者」とも評価されている。特に総務院長になって、宗団の宿願事業であった、「総務院廳舍の建立․中央僧歌隊の移轉」などの問題を解決された。来年完工予定の「韓国仏教文化歴史記念館」の礎石を築いた。

  正大さまは韓国の仏教の国際化․大衆化にも関心を持たれた。1977年には「日韓仏教文化交流会」を結成し、1989年には仏教放送財団の理事長になって放送局の開局に主導的役割を演じた。そして私財を投して「ウンジョン獎學財団」を設立し、独児家庭の学業も支援した。

  元大統領である金大中氏とは莫逆の友であることも広く知られている。故人は、今年の初めに総務院長職を退き、仏教新聞とのインタービューで自らを「政治僧としては創宗以来No.1」とも表現した。
 40年近く正大さまと交流してきた観音宗の総務院長の泓坡さまは、「故人は現代的感覚が溢れ、リーダーシップが引き立つ人だった。」と言う。

  正大さまは参禅修行にも熱心だった。恩師である田岡さまから教わった板齒生毛(門歯に毛が生えた)を話頭とし、「心さえあれば衆生は仏と同様。」ということを悟られた。以後、道峰山望月寺の禅寺を初め、修德寺․龍珠寺の禅寺などで修行を積んだ。仏教の修行と実務を兼備したのだ。

  告別式は22日、午前10時京畿道華城市龍珠寺で東国学院葬で行われる。